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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에서 내가 있는 이곳까지-2015년10회개인전서문 김지연 미술비평
mygrim ( HOMEPAGE )10-19 22:53 | HIT : 1,035

저기에서 내가 있는 이곳까지   김지연(미술비평)

우리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들, 예를 들면 여기, 저기, 거기, 이곳, 저곳, 그곳과 같은 지시어들을 알고 있다. 이 단어들은 화자로부터 대상까지의 거리를 전제로 그 위치를 특정하는데, 이는 대상에 대한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 거리도 포괄하며, 위치는 운동의 방향성을 함축한다. 화자의 위치를 근거로 선택하는 장소 지시어는 화자가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나 입장, 거리감 등을 드러내는 데도 유용하다. 이 위치들은 개별적으로 오롯이 독립되어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결되어 있으며,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여기’는 ‘저기’가 되고, ‘저기’ 또한 ‘여기’가 되는 식으로 상대적 관계 안에서 정립된다. 위치에 대한 인식과 위치 간의 관계를 회화적 문법으로 연결 짓는 방식에 대한 관심이 박영균의 근작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가 일련의 작품 제목에 <저기에서 내가 있는 이곳까지>, <그곳으로부터 이곳으로>처럼 처소에 대한 지시어를 사용한 것이 화가 자신의 위치와 화면 위에서 펼쳐지는 대상들 간의 위치를 얽어나가는 관계망에 주목한 결과로 보이는 것은 그가 선택한 지시어들의 함의 때문이다. 이는 비단 작품 제목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며, 그가 시도한 화면 구성 방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때 그의 화면은 열띤 색채와 선명한 이미지로 채워졌다. 자신이 속한 뜨거운 세대가 성취했다고 하는 변혁의 시대 이후, 다변화되어버린 시대 가치와 정서에 응대하는 ‘자신의 세대’에 대한 변론이자 자화상 같았던 그의 작업은 변명/옹호하는 자의 객관화될 수 없는 서정적 감수성을 담고 있었다. 자신의 시대와 세대에 대한 그의 입장에 추상성은 없었으며, 당시 그에게 ‘저기’와 ‘내가 있는 이곳’ 사이의 거리감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기와 저기를 오갔고, 물리적 ‘저기’는 심리적 ‘여기’였을 터이다. 그 경험의 진솔함과 감정이입의 정도는 그의 작업이 전달하는 메시지에 대한 관람자들의 감정적 몰입도를 높였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는 ‘내가 없는 저기’와 ‘내가 있는 여기’ 사이의 간극을 의도적으로 인식하려는 태도를 화면 안에 담는다. 여전히 동시대 문제적 현장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한진중공업 사태, 4대강 문제, 세월호 사고 등 우리를 옭아매는 무거운 현실에 대하여 꾸준히 그림으로 발언하는 중이지만, ‘저기’에 대한 밀착도에는 변화가 생겼다.
그는 (투쟁의) 현장에 동참하여 연대의 몸짓을 보여주는 (예를 들면 희망버스 탑승 같은) 직접적인 사회 참여의 가치와 힘을 알고 있으며, 그 구체적 경험을 바탕에 두고 작업을 하기도 했으나 그 자신의 눈이 현장을 직접 확인했느냐 하는 점이 작업을 위한 절대적 전제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이로부터 대상과 화가 사이에는 물리적 거리감이 형성되었다. 직접적인 경험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이야기들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이 현장을 향하고 있는 다양한 시선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하고 재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강화되었고 ‘여기’와 ‘저기’의 관계 방식을 시각화하는 데 집중하는 듯 보인다. 결과적으로, 직접 체험이 견인하던 감정적 몰입도의 자리는 대상과 담담하게 거리를 두자 두드러진 시선의 정치가 차지했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형상의 에너지를 발견하고, 그 에너지를 매개로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회화적으로 연결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에너지를 발견한 형상, 이미지는 작가 개인에게 온전히 속해 있는 작업실 현장의 것이기도 하고, ‘저기’에 갔던 그가 포착한 현장의 이미지이기도 하며, ‘저기’를 ‘여기’로 체험한 사람들이 사이버상에 올려놓은 이미지이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소위 말하는 확장된 안구들(위성사진, 구글, 네이버, 다음 등의 거리뷰 같은)이 채집한 이미지기도 하다. 사건/현장은 이미지로 빠르게 흡수/저장되니, 이미지는 사건/현장을 바라보거나 환기하게 시키는 매개가 된다. 매체가 확대되면서 하나의 사건을 담는 다양한 시선이 넘쳐난다. 이미지 안에 박제되어 떠도는 사건의 파편들이 판단을 마비/유보할 정도로 넘쳐나는 와중에 박영균은 현장을 향한 여러 시선이 혼재된 이미지들 속에서 ‘에너지’를 발견하고 그 내적 파동을 연결지어 화면에 배치, 메시지를 이끌어 내는 데 집중한다.
그가 추구하는 화면 구성 방식은 주제나 사건을 도식적으로 맞추는 기계적 조합과는 거리가 있다. 작가가 ‘에너지’를 언급하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바, 그는 분절된 이미지들 사이에서 읽을 수 있는 정신적 연대감을 연결고리 삼아 자신의 문맥으로 재구조화하고 있다. 서로 다른 맥락의 장면 이미지들을 엮어 이야기 구조를 구축하거나 메시지를 강화하는 시도는 만화의 한 컷, 플라스틱 인형, 사람, 사건의 장면, 풍경 등을 섞어 구성하여 완성했던 <세 가지 풍경 속에 있다>, <쫘아악>, <해적 깃발이 보이는 풍경> 같은 2009년 무렵의 작업부터 등장했다. 이질적 요소들을 한 화면에 분절적으로 병치하자, 화면이 다루고 있는 현실의 부조리가 안고 있던 무게감이 휘발되면서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현실의 사건들을 판타지적으로 재구성한 결과, 문제의식에 대한 발언의 목소리보다 현실을 (판타지처럼) 대하는(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무기력감, 외면하는 태도가 부각되었고, 무기력에 대한 각성이 역설적으로 무거운 현실을 소환해오는 형국이었다.
이 시기와 비교했을 때 2010년 이후의 작업들에서는 화면 구성 요소로부터 야기되는 판타지성이 사라졌고 장면들은 좀 더 유기적 관계망 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면들 간의 연결고리를 섬세하게 찾아 구조를 짜기 때문인데, 이는 화가 박영균의 기술적 성취이기도 하고, 기계적이고 표면적인 조합보다 내밀한 흐름을 시각화하고 싶어 한 작가 의지가 본격적으로 작동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하나의 상황으로 향하는 외부의 다양한 시선을 편집하면서 작가는 시선들이 포착한 사건의 장면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나온다. 작가가 직접 촬영한 이미지의 중요성도 약화된다. 나에게 밀착된 직접 체험의 친밀감은 덜어내고, 수집한 이미지들을 회화적으로 구조화하기 위해 화면과 사건으로부터 정서적 거리감을 확보한 셈인데, 화가가 선택한 거리감은 소격효과를 가져와 관람자들이 그의 그림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돕는다.

화가가 대상과 어떤 거리 두기를 하되, 관념의 유희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대상을 향한 여러 갈래의 시선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저기’ 그들이 있는 현장과 ‘여기’ 내가 있는 작가 작업실을 한 화면 안에 구성하면서 사용한 이미지 조각들의 선택과 조합의 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모니터가 두드러진 작업실의 풍경은 작가의 이러한 태도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하는 데 일조한다. 한진중공업 사태에 얽힌 일련의 움직임들로 구성한 <저기에서 내가 있는 이곳까지>, <그곳으로부터 이곳으로>라든가, 사대강 공사 현장에 대한 작업 <낙동강에서>, <2010년 겨울>, 위안부 문제와 일본문화원 앞에 세워 놓은 소녀상을 둘러싸고 발생한 상황을 다룬 <소녀와 카우보이> 등에 한결같이 등장하는 작업실 모니터에는 작가가 바로 그 화면 안에서 다루고 있는 현장과 관계된 이미지가 떠 있다. 화폭에서 펼쳐지는 ‘저기’에 대한 기록 이미지를 ‘여기’ 모니터 위에 띄워 놓으니, 여기와 저기가 동일한 상황에 얽혀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게 모니터는 안과 밖의 연결고리가 된다.
실제 일상생활 속에서도 모니터(라고 쓰고 사이버 세상이라고 읽을 수 있는)는 바깥 세상의 소식을 작업실 안으로 불러들이는 매체로 활약한다. 모니터(인터넷)가 있는 작업실 풍경을 화면 안에 담는 작가의 선택은 물감과 붓과 책꽂이만 보이는 작업실 풍경을 그려 넣는 것과 확연히 다른 층위를 만들어낸다. 관람자는 모니터에 떠 있는 이미지와 그 바깥 현장의 이미지가 연동된 ‘작품’을 보면서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인 사이버 세상과 실제 세상 사이의 간극, 실제의 가상화나 분열, 정보 왜곡에 대해 생각한다. 동시에 모니터가 있는 작업실 풍경은 관람자의 눈 앞에 펼쳐진 작품의 장면이 작가에 의해 필터링 된 내용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정보 조합의 현장을 보는 일은 관람자들이 화면 속 사건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 바라볼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작가, 관람자, 화면 속 현장 사이에서 형성되는 담담한 거리감은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일조한다.

<낙동강에서>는 지인들과 함께 4대강 공사 현장에 답사를 다녀온 후 완성한 작품이다. 굴착기와 트럭이 현장을 누비고 있긴 하지만, 작가가 구성한 당대적 사건을 향한 시선은 파헤쳐진 땅을 웅크린 나신으로 뒤덮은 <2010년 겨울>이 현장을 다룬 방식과 비교하면 담담해 보인다. 단체 여행을 떠난 사람들처럼 풍경 속에서 서성이는 일행들의 모습이 그 현장을 대면한 이들의 담담함을 강화하는 모양새다. 그가 모니터 화면 위에 띄워 놓고 화폭에 옮겨 담는 중인 이미지 역시 여유롭게 물가에 머무는 일행들의 뒷모습이다. 폭력적이었을(것이라고 추측되는) 현장의 난폭함(이라고 판단할 법한 상태)이 개인에게 어떤 경각심을 주었을지 이 장면에서는 알 수 없다.
현장을 목격하지 않은 채 서로 다른 관점을 달리는 매체들이 전해주는 상반된 정보들을 조합하며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그의 이 그림은 선명한 판단의 근거가 되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객관적’이라거나 ‘중성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이 풍경에서는 오히려 사건의 현장을 대하고, 사건을 다룬 이미지를 접하고, 이들 이미지와 경험을 엮어 화폭 위에 하나의 구조체를 만드는, ‘화가’ 박영균이 두드러진다. 그가 ‘현장’을 대상화한다거나 단순한 작업소재로 소비한다는 뜻은 아니다. 폐쇄적 일상의 공간인 나의 현장 여기 작업실과 부조리함을 대면해야 하는 사회적 현장 사이에서, 화가가 직업인 작가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실천적 행동이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입장을 살피게 된다.
<그곳으로부터 이곳으로>에서는 현장과 작업실의 관계가 더 직접 드러난다. 모니터 너머 한진중공업 사태의 현장으로 이어지는 푸른 커튼 저편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불쑥 작업실로 촛불을 건넨다. 이 인물은 작가의 자화상 같기도 한데, 그가 작업실로 전하는 촛불은 이 시대에 화가의 실천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처럼 보인다. 한진중공업 사태를 다룬 또 다른 작품 <저기에서 내가 있는 이곳까지>에서는 저기와 여기를 잇는 이미지들의 관계망에 대한 회화적 표현을 강화하고 있다. 화면의 왼쪽 ‘저기’는 한진중공업 크레인이 있는 풍경이고 오른쪽 여기 이곳은 화가의 모니터가 있는 작업실이다.
이곳 작업실에는 박영균이 살아내는 일상의 흔적이 있고 저기에는 투쟁과 연대의 상황이 있다. 이 두 위치를 연결하는 고리는 역시 모니터 화면이다. 작가는 모니터가 있는 작업실의 풍경을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는데, 한진중공업의 현장을 보여주는 모니터, 그 현장을 띄워놓은 모니터가 있는 작업실 이미지를 담고 있는 모니터, 다시 한진중공업 현장 이미지가 있는 모니터 등 이미지 속 공간과 현실공간을 중첩하면서 배치한다. 반복되는 작업실 풍경은 부산으로 향하는 희망버스 탑승객 행렬 사이로 스며들고, 군중과 늘어선 버스는 크레인이 있는 풍경으로 이어져 크레인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부산 바다 풍경에서 멈춘다.
이렇게 진행되는 화면의 흐름은 예술가 박영균이 현장 속으로 다가가는 방식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부산의 현장에 가지 않았던 작가는 ‘네티즌’으로서 사이버공간에서 확보할 수 있는 관련 이미지들을 모아 화면을 구성했다. ‘여기’ 머무는 작가는 ‘저기’를 향한 다른 시선들이 선택한 이미지들을 엮어 흐름을 만들었으며, 그의 의식은 그가 만든 흐름의 파동을 타고 ‘저기’까지 다녀온 셈이다. 예술 노동자로서 작업을 생산하는 화가의 작업실과 내 작업환경까지도 포괄하여 노동환경 전반을 지배하는 부당함에 대한 저항과 연대의 움직임이 전개되는 현장은 이렇게 이어졌다. 결국 ‘여기’는 ‘저기’의 부분집합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다.

타인의 시선이 포착한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메시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담고 있는 에너지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는 감식안이 필요할 터다. 그가 뉴스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뉴스의 사진기사를 그리면서 박영균은 이미지의 정치를 들여다본다. 동일 공간에서 동일한 복장을 하고 같은 성격의 일을 하는 두 사람의 노동자를 그린 <뉴스 그리기>를 보면서, 우리는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정규직이고 누가 비정규직인지 구별해야 한다. 그가 원본으로 삼은 뉴스 사진이 그 질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를 통해 이를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지와 진실 사이의 거리를 환기하게 하는 이 작업은 동시에 이미지의 정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던져준다. 많은 눈들이 생산하는 과부하 상태의 이미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개별 이미지들과 이미지들의 배치가 함유하거나 은폐하고 있는 실체적 진실을 끌어올리는 일은 이미지를 다루는 비정규직 노동자 박영균이 실천적 지성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가장 진솔한 ‘노동’이며 ‘사회참여’다. 2015년 현재 박영균은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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