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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들여다 듣는 언덕> 그때 박영균이 있었다 - 양정애(미술이론)
mygrim ( HOMEPAGE )10-21 14:16 | HIT : 645
그때 박영균이 있었다
양정애(미술이론)

1. 들어가며  

        예술가가 작품을 하는 데 있어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객관화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까? 그가 속해 있는 여러 위치들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의 효과는 무엇일까? 예술가 스스로 자신이 속한 사회 공간에서의 여러 위치를 드러낼수록 그의 작품을 덜 객관적으로 보이게 하지는 않을까?
        박영균의 작품에는 그가 서 ‘있던’ 삶의 ‘현장’들이 있고, 현장의 대부분은 동시대 대한민국의 사회역사적 순간들을 관통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허구가 아닌 현실을 오브제로 삼는 이 다큐멘터리 안에서 작가 자신은 일종의 연출자가 되어 작품 안에 집어넣을 현실을 선택하고 편집한다. 그는 자신이 기록한 현실의 한 측면에 대해 관객을 특정한 시각으로 설득시키기 위해 작품 속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등장한다. 때로는 작품 뒤에서 현실을 해설해 주는 주체로, 때로는 작품 한 구석에서 현실을 관망하는 주체로, 때로는 작품 안에 등장한 또 다른 대상들과 상호작용하는 주체로, 때로는 그러한 현실에 개입하고 있는 자신의 실체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끊임없이 성찰하는 주체로 말이다. 이데올로기를 긍정하면서 예술의 자율성을 추구하려 했기에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질문들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에 그는 작품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디에 두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대답한다.

[그림 ] 박영균, <난 나를 모욕한 자를 늘 관대히 용서해 주었지 하지만 내겐 명단이 있어 Ⅲ>, 캔버스에 아크릴, 97×145cm, 2018
        광화문 한복판에 서서 “난 나를 모욕한 자를 늘 관대히 용서해 주었지. 하지만 내겐 명단이 있어”[그림 1]를 외치는 작가를 보며, 명단의 구체적 대상을 물었다. 작가는 블랙리스트, 검찰개혁, 모피아(Mofia), 핵피아(원전마피아) 등 우리 사회 곳곳의 고질적으로 바뀌지 않는 적폐 세력에 대한 답답함을 언급하는데, 그 앞에서 소위 진보적 세계를 둘러싼 믿음과 변절, 그리고 현실 속에서 부정할 수 없는 욕망과 혼동을 떠올렸다면 너무 냉혹한 것일까. 이 글은 세대담론으로 거칠게 표현하자면, IMF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 시대를 겪으며 냉소에 익숙한 이후 세대의 시선으로 민주화 주체이자 격동의 역사를 경험한 386세대 작가의 다소 낭만적으로까지 보이기도 하는 작품 속 세상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이해해 나가는 과정의 기록이라 하겠다. 그의 삶의 변곡점마다 그가 어떻게 예술을 통해 자기를 객관화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냈는지를 읽어나가는 행위가 어쩌면 오히려 한 명의 386세대의 인물이 아닌 예술가로서 또렷하게 바라보는 길일 수 있음을 생각해 본다.  


2. “중간에 친구를 만난 거지. 그런데 그 길동무들이 꽤 괜찮은 사람이었어”: 1980년대 말-90년대의 현장

“현장 활동 시기는 본인에게는 많은 교훈과 미술이 사회에서 어떻게 소통할 것이며, 어떻게 보여지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대학 3학년 시기에 가슴에 와 닿았던 ‘예술의 표현은 삶에 있다’ 이 간결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고, 그 충격에 대한 실천으로써 현장미술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써 본인의 창작에 있어서도 리얼리티는 삶을 중심에 둔 소통과 형식에 대한 고민을 더욱 확장시켜주었고, 작가로서의 객관성 또한 획득하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림 2] 미술패 ‘쪽빛’, <해방(청년)>,  경희대 벽화,
17x11m, 1989/2017
  
[그림 3] 박영균, <벽화 앞에서>, 캔버스에 유채, 40×30cm, 1989


        박영균은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분석한 이 글에서 현장미술 활동의 시기를 1990년에서 1996년까지로 구분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우연히 멕시코 벽화집을 접하고 예술의 다른 세계를 본 박영균은 서울지역 미술대학생 중심의 ‘대학미술운동연합’(학미련, 1988)과 대학 내 미술패 ‘쪽빛’을 조직(1989년)하고 많은 벽화를 그렸다. 그 중 대표적인 작업이 자신의 모교인 경희대학교 문리대학 벽에 그려진 <해방(청년)> 벽화이다. 백두산을 배경으로 민중의 건강한 삶의 모습을 대학 내 가장 치열한 운동공간에 표현한 작품이다. 당시 선전선동의 도구로서의 민중미술 계열에 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노동자·농민상을 도상으로 택한 이 공동작업[그림 2] 속에서 당연하게도 예술가 개인의 독자성(singularity)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같은 시기 그린 벽화 앞에 흰 머리띠를 두른 자신의 모습을 삽입한 <벽화 앞에서>[그림 3] 속에서는 그림 그리는 예술가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숨길 수 없는 박영균의 의지가 드러난다.
  

[그림 4] 홍성담, <투사회보 1>,1986

  
[그림 5] 박영균, <벽보 선전전>, 캔버스에 아크릴, 145x820cm, 1990


[그림 ] 박영균, <2016년 보라Ⅱ>, 캔버스에 아크릴, 162×336cm, 2016



        대학을 졸업한 박영균은 소집단 미술운동단체 ‘가는패’에 들어갔다. ‘가는패’는 ‘서울민족민중미술운동연합’(서미련)으로 확대 개편하여 활동하였고, 서미련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박영균은 서미련이적단체 사건으로 구속된 12명의 예술가들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6개월의 옥고와 함께 집행유예 2년을 선고(1990)받았다. 이 무렵 그린 것들이 <벽보 선전전>(1990), <유치장에서 (1차 이라크전쟁 파병반대)>(1990), <강경대 장례식 날, 이대 앞에서>(1992), <명동성당>(1993)과 같은 북한미술에 영향을 받은 리얼리즘 구상화 작업들이다. 그 중 저편에 서성대는 백골단을 망보면서 골목 모퉁이에서 벽보를 붙이고 있는 순간의 긴장을 포착한 그림 <벽보 선전전>은 기법적으로는 사실적 묘사에 중심을 둔 사회주의 혁명도구로서의 북한미술에 영향을 받은 작업이자, 구도와 내용적으로는 당시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현장운동을 함께 했던 ‘광주시각매체연구회’의 홍성담의 판화 작업[그림 4]에 영향을 받은 작업임을 밝힌다. <벽보 선전전>은 <2016년 보라 II>에서 다시 차용되어, 검열의 시대를 지내온 블랙리스트 예술가의 자화상을 연속적으로 드러낸다.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의 박영균은 대중들에게 혁명적 삶을 즉각 전달하려는 목적을 위해 그는 작품 뒤에서 현실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주는 주체로 현장에 서 있었다. 1980년대의 어떤 민중미술의 전통 안에서는 개인 예술가로서의 면모는 무화(無化)되는 것이 미덕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 시기 그림을 두고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한 그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표면적 입장과는 별개로, 작품 안에서 끝내 ‘자기’를 버리지 않았던 점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민중미술 선배 세대의 방식을 잇던 ‘벽화 앞에 선’, ‘망보던’ 20대의 박영균은 50대의 ‘망보는 박영균’으로 이어졌다.

“(...) 중간에 친구를 만난거지. 그런데 그 길동무들이 꽤 괜찮은 사람들이었어요.(...) 비슷한 길을 걷는 예술가들끼리 서로 물리고 물리면서, 계속 주고받으면서 그 세대의 이야기들이 이어가는 것 같아요. 어쨌든 유물론적으로 보는 예술은 창작이 아니라 흐름이잖아요. 그 흘러감을 읽는 거잖아. 어디로 흘러갈 건지를. 그래서 저는 예술가들의 네트워크나 연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스무 살 무렵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경희대 벽화 작업은 그의 출발이기도 했지만, 그의 삶의 궤적에서 때로는 발목을 잡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2016년 보라Ⅱ> 안에 다시 불러내어 그 시절의 자신을 긍정하는 것은 그의 남은 삶과 작품의 조직 방식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스무 살의 기억은 되게 크고, 그 때의 짧은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것 같아요.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지 자기 삶의 방식을 만들어줬어요. 색채로 표현하자면 밝고 맑은, (혁명적) 낙관. (...) 그래서 이렇게 흘러오지 않았나 싶어요.”


3. “비참할 정도로 나는 편하다”: 1997년-2002년의 현장

“이 시기는 혼자였다. 정신적 자괴감, 그리고 80년대와 90년대의 급변한 시기에 대한 부적응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젊은 혈기, 정의감으로 사회변혁의 길에서 미술활동을 통해 참여했지만 시대는 변했고 변한 환경 속에서 본인 자신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혼돈 속에서 80년대 끝자락의 정서를 가지고 비판적 시각으로 사회의 모습을 형상화한 시기였다.”


[그림 7] 박영균, <86학번 김대리>, 캔버스에 아크릴, 162×130cm, 1996
  
[그림 8] 박영균,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2>, 캔버스에 아크릴, 162×130cm, 2001


        박영균 스스로는 1997년에서 2002년 사이의 작품을 두고 작품 속에서 세대 정체성을 표현한 시기로 구분한다. 동구권이 무너지고 공통의 목표가 사라진 시대에서, 감옥을 다녀온 운동권 출신 예술가는 순수함을 지켜내야 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이어야 했다.

“저는 개인전을 97년도에 했거든요. 94년도에도, 95년도에도 할 수 있었지만, 우리 동료들이 다 작업을 안 하고 있는데, 저 혼자 개인전을 하면 되게 눈치 봤어요. 그래서 너무 그게 괴로웠어요. 제가 개인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때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한테는 내가 무슨 제도권에 편입되는 그런 낙인 같은. 제가 개인전을 하는 첫 스타트였거든요.”

        더 이상은 이렇게 무위도식하면 살 수 없겠다는 그의 결심은 <86학번 김대리>(1996)를 만들어냈다. 혁명을 해야 하기에 편하게 일상을 말할 수 없던 시기를 지나온 박영균에게 평범한 일상의 발견은 삶의 비참을 극복할 유일한 원동력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시대’를 그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일상’을 그려낼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백골단의 동태를 살피며 벽보를 붙이던 청년은 노래방에서 메마른 민중가요를 열창하고 있는 김대리가 되어 있었다. 두 주먹 불끈 쥔 김대리를 주목해 주는 것은 한낱 붉은색의 노래방 조명뿐이다. 김대리는 종종 <이번 생>(2001)은 글렀다고 한탄하며 밤새 술을 마시고, 그 술을 변기 붙잡고 게워내고(<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4>, 2003)), 다음 날 근근이 출근한 회사에서 탈출해 공원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개를 곁눈질하며 <땡땡이>(2002)를 치기도 하고, 스스로가 한심해진 어느 날 입에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며 자괴감을 달래보기도 하지만(<탕 거울 속의 입으로만>(1999)), 그래봤자(실존과 시대를 고민한다고 해봤자) 일상의 대부분은 살찐 소파 위에서 속옷 차림으로 누워 텔레비전 속 정치에 훈수나 두는 김대리의 모습은, 지난 평론들 안에서 자연스럽게 박영균의 페르소나(persona)로 대변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의 화가 박영균은 대한민국 평범한 회사원의 삶을 알 길이 없고, 작품 속 김대리는 박영균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김대리의 모습에 화가 박영균을 위화감 없이 겹쳐둘 수 있는 것은 그가 사회진출 모임을 하던 전대협 세대였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거창한 담론 속에서의 예술이 아닌 평범한 노동으로서의 예술 활동을 추구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4. “살찐 소파를 내다 버리고”: 2004년 이후의 현장


[그림 9] 박영균, <ANDY>, 디지털 프린트, 2007

        “ <11월 1일>이라는 영상작업을 했었어요. 그날이 2004년 11월 1일이에요. 라디오에서 아나운서가 이런 말을 해요. “오늘은 11월 1일이네요. (...)” 그날 문득 소파를 갖다 버리고, 그것을 하루 종일 촬영한 작업이에요. ‘내가 그래도 뭔가 전투적으로 삶을 살려고 했는데, 적어도 소파를 그리는 작가는 아니지 않나?’ 그래서 소파를 내다 버리고 (...) 그렇게 있다가 대추리를 만났죠.”
        
        ‘생활의 발견’이 익숙해지던 시기, 박영균은 또 한 번 작업에서 변곡점을 겪는다. 1996년 만들어진 작품 속 주체이자 일상의 노동자 김대리는 2004년 무렵까지 이어져 오면서, 작품 바깥의 주체인 화가 박영균에게 있어 더 이상 ‘발견’된 일상이 아닌 ‘권태로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는 지난 수년 동안 자신의 실존을 투영하면서 공허함과 씁쓸한 분노를 표현해왔던 바로 그 소파를 버리고 다시 새로운 현장을 찾아 갔다. 그에게 있어 예술가의 독자성은 좁은 작업실을 현장 삼아서는 온전히 발휘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의 작품 안에서 그런 현장은 그가 대안교육을 실천했던 부천의 산 어린이학교(<의무를 넘어>(2006))이기도 했고, 동료 예술가들이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외치며 주민들과 함께 투쟁하고 있던 대추리(<들 사람들>(2008)이기도 했다. 그는 거기서 붓 대신, 혹은 붓과 함께 카메라를 들었다.
        이 시기 대추리 작업들에서 박영균의 페르소나는 김대리 대신, 영화 <토이스토리> 속 캐릭터 우디 또는 그를 여전히 아껴주는 주인 앤디가 된다. 박영균은 한때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한 TV 인형극 시리즈의 주인공이었지만 이제는 한물 간 장난감 취급을 받는 우디를 데리고 다니며 현장을 기록한다. 우디는 삶의 터전이 불태워지는 대추리 주민들의 상처를, 그들과 함께하며 예술작업으로 투쟁하고 위로하는 예술가들의 활동을 증거하지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다.

“저는 현장작업을 안했던 것 같아요. 현장에 가본 적도 없고. 가기는 갔지. 대추리, 강정... 그런데 저 스스로를, 제가 거기에 전면적으로 투신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해요. 아예 처음부터 출발 자체를 ‘나는 그 사람들의 뒷모습 작업을 해야지.’ 그랬어요. (...) 전면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부채감 같은 것들은 항상 있어요. 그런데 저하고는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대추리에서 ‘나는 그 사람들이랑 같이 섞일 수가 없어.’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 현장에서는 열심히 싸우고 하는데, 늘 현장에 있으면서도 이거는 아닌 거야. 굉장히 관찰자 입장으로 본 것 같아요.”

        김대리는 친구들을 구하려 집 밖으로 거대한 모험을 떠나는 우디가 되어 다시 과거의 한때처럼 현장에서 활약하고자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화가 박영균은 ‘그 현장’에서도 우디가 활약하는 것을 지켜보는 또는 대신 그렇게 해 주길 원하는 앤디처럼 한 걸음 비켜나 있다. 분명 현장에 존재했으면서 “현장에 가본 적 없다”고 말하는 작가, 현장의 관찰자였을 뿐이라고 쉽게 인정해 버리는 작가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추리에 저 말고도 카메라를 든 작가들이 많았어요. 어떤 분들은 스스럼없이 카메라를 들고 주민들에게 다가갔어요. 저 역시도 처음에는 주민들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었어요. 그런데 도저히 들이 밀수가 없더라고. 나는 자격이 없는 것 같아. 나는 그 사람들과 못 친해질 것 같아. 내가 이 사람들한테 다가가면 엄청난 책임을 지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그게 좀 뭔가 폭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열성적으로 삶의 불합리함을 항의하는데 그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게 저는 불편하고 부끄러워서 카메라 각도가 항상 옆으로 있었어요. (...) 그런 태도가 그림에서도 보면 전면적으로 나서지를 못하는 것 같아. 항상 여지를 두고...”

“태생적으로 나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다, 그게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건 무슨 공동체의식 이런 걸 떠나서, 근본적으로 인간은 영원히 혼자라고 생각해요. (...) 제가 어릴 때 시골(전남 함평)에서 살면서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그런 아픔을 직접 겪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어릴 때 너무 큰 고통을 본 것 같아. 그렇다고 내가 눈물을 안 흘리는 것은 아니지만, 저한테는 질질 짜는 그런 감성들이 그렇게... 감동으로 안 와요. 특히 노동자 문제 같은 경우 그래요. 우리 누님들이 다 노동자였고 그런데, 저는 거기에 대해 과하게 숭고해지고 그러고 싶진 않아요. 그 노동을 제가 부정은 안 하는데. 그거에 저 스스로가 막 마취돼서... 내 심적으로 그렇게가 안 돼요. 현장의 예술가들에 대한 부채의식은 늘 있고, 같이 발 담그고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어요.”

        작품 안에서, 현장의 정보를 모으고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태도는 분명 양가적이다. 그는 현장과 자신과의 거리, 관계의 깊이를 현장의 상황에 맞게 조정하면서 상호작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가령 <들 사람들>에서 그의 시선이 대추리 주민들이 아닌, 차라리 라포 형성이 더 되어 있는 동료 예술가들에게 쏠려 있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림 ] 박영균, <노랑 건물이 보이는 풍경>, 캔버스에 아크릴, 168×240cm, 2004

  
[그림 ] 박영균, <2008년 6월 10일 스파 이더맨이 보이는 풍경>, 캔버스에 아크릴, 193x 355cm, 2008  
  
        현장과 자기와의 관계맺음의 정도에 따라 작가는 어느 한 쪽의 시선을 선택하거나 양쪽의 시선을 결합한다. 광화문 현장 한 쪽에서 현장을 지켜보는 작가의 모습은 그가 작품에서 여러 번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도상이다. 같은 구도 안에서 작가 주체의 모습은 같은 장소이지만 어떤 현장에 자신을 투영했는지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87년 6월 항쟁의 광장이었는지,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의 광장이었는지,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를 위한 광장이었는지에 따라 말이다. 하나의 역사적 현장에 대한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경험의 주체로서 작가는 필연적으로 –영웅이지만 본래의 신분을 노출하면 안 되는- 이중적 삶에서 고뇌하며 과거의 영웅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새로운 질서 속에서 관망할 수밖에 없는 스파이더맨에 자신을 투영한다.


5. “보라”: 지금, 여기의 현장

“2010년대 초중반 무렵, 그런 생각을 했어요. 현장에 가지 말고 그림을 그리자. 그래서 현장을 안 가고 컴퓨터 화면에서만, 현장의 사람들을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 이미지를 가지고 와서 그걸 내 작업실에서 조합을 해 보자. 그런데 실패했던 것 같아요. 역시 현장에 가야지. 예술가는 현장에 가서 보고 듣고 느낀 게 관객에게 전달되는 거지, 내가 감동도 없는데 기술로만 현장의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게 가능한가. 현장에 가지 않고, 감정을 배제하고 제3자의 입장에서 연출을 해보자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결국은 제가 거기에 좀 진 것 같아요. 역시 현장에 가서 같이 울고 웃고 그래야지 나도 신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깨달은 것 같아요.”

        박영균은 <저기에서 내가 있는 이곳까지>(2012)에서 부산 한진중공업 사태를 담았지만, 현장으로 가는 희망버스를 타지 않았다. 작업실에서도 SNS를 통해 현장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작가가 현장에 직접 가지 않는 것이 더 객관적으로 사안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 대한 일종의 실험이었겠지만 그는 그러한 접근이 실패했음을 고백한다.
        결국 그는 이상적이고 순수한 것을 지키는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 순수함이란 과거의 혁명에 대한 이상주의에서 현재의 현실과 괴리되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에 예술이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예술적 맥락에 있어서의 순수함을 포함한다. 이러한 성찰에 박영균의 예술가로서의 독자성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 그랬듯, 이러한 삶과 예술의 양식은 영웅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현실과 양립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필연적인 자기성찰적 모순을 생성한다.
        지금의 현장을 다시 찾아가게 된 작가는 놀랍게도 변증법적인 해결에 다다른다. 박영균은 예술가의 정체성을 버리고 현장에 투신하거나, 현장에서 도피하거나, 또는 현장에 다가가는 것을 주저할 필요 없는 동시에 지극히 예술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 주체가 있어야 하는 본연의 현장-작업실-과 예술가로서 사회참여적 역할을 해야 하는 현장을 한 화면 안에 서사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앞서 언급한 <2016년 보라 II>[그림 6]에서처럼 한 작업 안에 자신의 과거 작업을 호출하는 형태 -<벽보 선전전>(1990), <촛불소녀>(2008), <뉴스 그리기>(2013) 시리즈를 중첩하여 보여준 점- 는 자신을 매개로 시공간적으로 과거의 스펙트럼을 현재의 사건에 연결한다. 그래서 그는 현 세대에게, 386세대에게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게, 삶은 단절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이며 그 모든 순간은 서로 연결되고 그로써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보라”고 말한다.

“예술은 분명히 누군가한테 영향을 주지만, 그 징검다리는 자기가 놓는 거잖아요. 돌을 여기다 놓고 또... 계속 세대를 건너가는 사람들인데, 자기가 놓은 징검다리가 물에 안 쓸리어 가면 또 뒷사람이 볼 것이고. 그런 태도로 자기가 자기 삶을 그냥 살아내는 것 같아요.”



         

31  2021 <보라색 언덕 너머 Beyond the purple hill>보라색 언덕 너머, 하늘 끝까지 따르리라-김허경(미술비평)    mygrim 2021·11·29 628
30  2020 <들여다 듣는 언덕> 박영균과 박영균 사이 - 최범(미술평론가)    mygrim 2021·11·29 609
 2020 <들여다 듣는 언덕> 그때 박영균이 있었다 - 양정애(미술이론)    mygrim 2021·10·21 645
28  2020 <들여다 듣는 언덕> 그곳에서 우리가 있는 이곳까지 - 김종길(미술평론가)    mygrim 2021·10·14 671
27  2020 <꽃밭의 역사> 전시 서문 - 김정연(큐레이터)    mygrim 2021·10·14 635
26  2020 월간미술 <꽃밭의 역사> 리뷰 - 김준기(미술평론가)    mygrim 2021·10·14 624
25  경향신문 김지연의 미술 소환    mygrim 2017·01·14 3996
24  경향신문 그날의 광장, 그 뜨거웠던 함성의 기억들    mygrim 2016·05·06 7701
23  [김지연의 미술 소환]그 총알들 어디로 갔을까 경향신문    mygrim 2016·04·21 4357
22  저기에서 내가 있는 이곳까지-2015년10회개인전서문 김지연 미술비평    mygrim 2015·10·19 4146
21  밝 은 사 회박영균 & 론 잉글리쉬-김영애 서울 오페라갤러리 큐레이터    mygrim 2009·10·17 7131
20  2008 개인전 서문 액티비스트 박영균의 작업실 발(發) 명상 김준기 (미술평론가)    mygrim 2008·11·11 5731
19  빨강풍경과 노랑풍경을 지나 - 김준기    mygrim 2008·05·09 5888
18  박영균론-통약불가능한 알레고리, 멜로디에서 화성和聲으로- 박응주    mygrim 2008·05·09 6268
17  열 개의 이웃 프로젝트 리뷰 - 김준기    mygrim 2008·05·09 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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